지금 우리들이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듯이 한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은 1895년 프랑스의 사진사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 1864∼1954)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1862∼1954) 형제가 만들어 낸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가 최초였다. 그들은 에디슨-딕슨 발명품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개조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1895년 3월 뤼미에르 형제는 국가산업진흥협회에서 그들의 영사기를 전시했으며 12월 28일에는 프랑스 파리 시내 그랑카페 카퓌신에서 1프랑을 받고 <기차의 도착>을 최초로 상영하였다. 그들이 영사하는 데 사용했던 ‘시네마토그라프’는 카메라뿐 아니라 영사 기능도 있었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보다 훨씬 작고 가벼워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훨씬 기동성이 있었다. 이는 영화의 피사체를 선택하는 데서 명백히 드러났다. 그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하는 대신 야외에서도 작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만든 영화는 기록 영화로 공장 종업원들이 일을 마치고 공장의 문을 나서는 모습을 한곳에서 촬영한 <뤼미에르 공장의 출근>이었는데, 전체 상영 시간이 1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점차로 관객들은 뤼미에르 형제가 공개했던 단순한 영화로는 만족을 하지 못했다. 영화는 점차 다양한 실험을 거치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로 거듭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화의 탄생 (영화의이해, 2014. 2. 28., 커뮤니케이션북스)
목차
- 영화 탄생 배경
- 토머스 에디슨
-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
- 조르주 멜리에스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영화를 위한 과학 장치들을 발명했는데, 1891년에 발명한 키네토스코프는 혼자서 영화를 들여다보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 시내 그랑카페 카퓌신에서 촬영과 영사가 결합된 획기적인 영화제작 장치인 ‘시네마토그라프’를 선보였다. 이 도구는 현재와 같이 많은 관객들이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형태로 상영하는 기기였다. 최초로 상영된 <기차의 도착>부터 영화는 관객들에게 환상적인 경험을 하게 해 주었으며,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영화 탄생 배경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돌릴 때 왜 연속된 원을 이루는가 의문을 제기했었다. 그 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밝은 빛을 보고 나서 고개를 돌려도 지속적으로 그 빛을 보고 있는 듯이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잔상 효과(persistence of vision)’는 눈으로 본 이미지를 뇌가 기억하고 있어서 바로 다음에 이어서 본 이미지와 겹쳐져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특정한 이미지를 빠르게 움직였을 때 하나의 움직이는 영상으로 보이는 효과라 한다.
이는 눈의 망막에 이미지가 남아 있어 영상의 겹침이 일어나게 되는 눈의 반응이다. 영화는 1초에 여러 장의 이미지를 연속으로 보여 주어 잔상 효과가 일어나고, 이로 인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요술 회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소마트로프(Thaumatrope)’는 단순히 양면에 그림이 있는 종이 원판이었다. 예를 들면 한 면에는 새장, 다른 면에는 새가 그려 있어 원판을 회전시키면 잔상 효과에 의해 새가 새장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춤추는 여자와 남자는 같이 춤추는 것처럼, 기수와 말은 기수가 말 등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인기를 끌어 1820년대 말에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원판 실험들이 유행했다.
1832년 브뤼셀의 조지프 플래토(Joseph Plateau)는 두 개의 원판으로 이루어진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라는 도구를 만들었는데, 두 개의 원판 중 하나는 가장자리에 구멍이 나 있고 다른 하나는 안쪽 면의 구멍들 사이에 사람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거울 앞에서 원판을 돌리며 구멍을 들여다보면 마치 연속된 움직임처럼 보였다.
<그림 1> 소마트로프(Thaumatrope)출처 : Jack and Beverly’s Collection.
구멍을 뚫은 원판은 회전 원통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 윌리엄 조지 호너(William George Horner)가 1834년에 만든 이 ‘조트로프(Zoetrope)’는 원통 안쪽 면을 따라 그림 띠가 둘러져 있고 수직의 틈새로 들여다볼 수 있게 구성되었다. 그로인해 연속적인 움직임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것은 인기를 모았으며 현재도 장난감 가게에서 볼 수 있다. 원과 원통은 움직이는 그림에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고 직접적으로 애니메이션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실험의 영향으로 에밀 레이노(Emile Reynaud)가 1876년 ‘조트로프’를 개조하여 만든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에 의해 최초로 움직임을 그림에 영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잔상 효과 실험은 1835년 영국인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W. H. Fox Talbot)이 최초로 만든 네거티브 필름(Negative)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얇은 종이에 밀랍을 칠하면 네거티브에 빛이 통과되어 감광 유제를 입힌 또 다른 종이 위에 비춰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 카메라 앞의 대상과 일치하는 포지티브 프린트(positive print)를 탄생시켰다. 그 후 1837년, 프랑스의 무대장치 설계사인 루이스 다게르(Louis Daguerre)는 ‘은판 사진술’이라는 새로운 사진술을 발명하였다. 다게르는 최초로 사진에 대중적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되었다. 사진의 보급과 상업화에 성공하자 당대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을 기록하려는 활동을 벌이는데, 1878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dward J. Muybridge)가 24대의 사진기로 말의 움직임을 담은 연속 사진을 발표해 움직이는 이미지의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그림 2> 머이브리지의 말의 움직임 실험(1878년)출처: Wikipedia
또한 1881년 프랑스의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Etienne-Jules Marey)가 ‘사진총’이라는 카메라를 개발한다. 이 카메라는 5/100초의 속도로 갈매기가 나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다. 머이브리지와 마레의 실험은 발전을 거듭하여 영화가 초당 24프레임으로 촬영되고 상영되도록 발전, 현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토머스 에디슨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활동사진에 흥미를 느낀 것은 1877년에 발명한 원통형 축음기에 시각적인 부수물을 덧붙이려는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마침내 에디슨은 그의 파트너 윌리엄 딕슨(William Dickson)과 함께 1891년 5월에서 1892년 10월 사이 수직으로 돌아가는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고 이름 붙인 요지경 장치를 선보였다. 키네토스코프는 관람객 혼자서 장치 속의 영화를 들여다보는 형태였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키네토스코프 장치 앞에 길게 줄을 서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에디슨과 딕슨은 1893년 ‘블랙마리아’라는 최초의 스튜디오를 만들었는데, 이 스튜디오는 지붕을 열 수 있어 조명을 위해 태양광이 최대한 유입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에디슨은 키네토그래프와 축음기를 연결시킨 키네토폰(Kinetophone)을 개발하여 유성영화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6년에 만든 <애너벨의 나비춤>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필름 위에 직접 색칠하는 것으로 에디슨을 최초로 영화에 색을 입힌 발명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는 많은 발명 특허로 영화계의 거물이 되었고, 1908년 12월 영화특허회사(MPPC-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를 설립하여 영화제작, 배급, 상영에 관한 특허료를 받았다. 그의 특허권에 대한 특허료를 지불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영화제작자들은 그의 특허료를 피해 서부로 이주하였고 지금의 할리우드가 탄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독립 영화제작사였던 유니버설스튜디오, 워너브러더스 등은 에디슨 덕분에 세계 최대 영화제작 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림 3> 키네토스코프출처: Eduhacker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
지금 우리들이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듯이 한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은 1895년 프랑스의 사진사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 1864∼1954)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1862∼1954) 형제가 만들어 낸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가 최초였다. 그들은 에디슨-딕슨 발명품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개조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1895년 3월 뤼미에르 형제는 국가산업진흥협회에서 그들의 영사기를 전시했으며 12월 28일에는 프랑스 파리 시내 그랑카페 카퓌신에서 1프랑을 받고 <기차의 도착>을 최초로 상영하였다. 그들이 영사하는 데 사용했던 ‘시네마토그라프’는 카메라뿐 아니라 영사 기능도 있었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보다 훨씬 작고 가벼워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훨씬 기동성이 있었다. 이는 영화의 피사체를 선택하는 데서 명백히 드러났다. 그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하는 대신 야외에서도 작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만든 영화는 기록 영화로 공장 종업원들이 일을 마치고 공장의 문을 나서는 모습을 한곳에서 촬영한 <뤼미에르 공장의 출근>이었는데, 전체 상영 시간이 1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점차로 관객들은 뤼미에르 형제가 공개했던 단순한 영화로는 만족을 하지 못했다. 영화는 점차 다양한 실험을 거치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로 거듭나게 된다.
<그림 4> 시네마토그라프출처: Digital Media for Artist
조르주 멜리에스
프랑스에서 마술사로 활약을 하던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1861∼1938)는 발명욕이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는데, 영화제작에 매료되면서 1896년부터는 직접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는 특수효과 촬영을 위한 세계 최초의 영화 촬영 스튜디오를 건립하는 한편 직접 영화 세트를 세웠다. 그는 1902년 <달 세계의 여행>을 만들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중 촬영과 페이드인과 아웃, 촬영 속도의 조정 등을 개발하여 영화 표현의 폭을 넓혔다.
<그림 5> 달 세계의 여행출처: <달 세계의 여행>(1902)
또한 편집 원리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극영화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멜리에스는 영화적 흥미와 흥행으로서 영화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또한 그는 무성영화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 끝에 유성영화 기기의 개발을 시도하는 등 추후에 탄생될 유성영화를 예고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로베르 우댕극장에서의 한 부인의 증발>(1896), <드레퓌스>(1899), <달 세계의 여행>(1902), <걸리버 여행기>(1902), <불가능 세계의 여행>(1904), <해저 20만리>(1907)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이용배(2003년) 『애니메이션의 장르와 역사』. 살림.
- C. W. Ceram(1965년) Eine Archaologie des Kinos. Rowohlt. 권기돈 · 이영미 옮김(1996년) 『사진으로 보는 영화의 역사』. 새물결.
- Gronemeyer, Andrea(1998년) Schnellkurs Film. Dumont Buchverlag. 권세훈 옮김(2005년) 『영화』. 예경.
- Toulet, Emmanuelle(1988년) Cinematographe, invention du siecle. Editions Gallimard. 김희균 옮김(1996년) 『영화의 탄생』. 시공사.
온라인사이트
- http://brightbytes.com/collection/thaum.html
- http://www.eduhacker.net/libraries/5-reasons-libraries-fail-written-1864.html/attachment/kinetoscope
- http://en.wikipedia.org/wiki/File:The_Horse_in_Motion.jpg
- http://www.dma.ufg.ac.at/assets/14100/intern/cinematograph.jpg
[네이버 지식백과] 영화의 탄생 (영화의이해, 2014. 2. 28., 커뮤니케이션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