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남화정
가을을 맞아 모처럼 집안 정리를 하는데, 기타 하나가 걸리적거린다. 동생이 호기심에 장만했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장롱에 넣어 두었던 것이 십여 년.. 가족들은 ‘누구든 기타 칠 사람이 있다면 주자’,‘아무도 연주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참에 버리자’설왕설래했지만, 요즘 세상에 기타를 친다는 사람도 없고, 멀쩡한 악기를 버릴 용기도 없어 다시 장롱 안에 자리를 잡았다. 몇 연만 지나고 나면, 그 기타를 버리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한때는 기타 반주에 목청 높여 노래를 하는 것이 이 땅의 청춘남녀들의 상징이기도 했건만, 이제는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기타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인간 생노병사의 한 끝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허해진다.
우리 전통 악기 중에 비파(琵琶)라는 것이 있다. 비파는 둥그스름한 몸체에 긴 목이 있고, 거기에는 기타의 플랫과 비슷한 ‘괘’라는 것이 있어서 음정을 만들어 내도록 한다. 또 줄은 목 끝에 달린 주아에 연결되어 주아를 돌리면 음정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고, 연주를 할 때는 손가락이나 ‘발’이라는 도구로 줄을 뜯거나 쳐서 소리를 낸다. 생긴 모양새나 연주법을 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기타와는 조상이 같으려니 생각하게 될 것이다.
비파는 조선시대 말까지 꽤나 인기 있는 악기였다. 특히 선비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때로는 거문고의 지위를 대신하기도 했다. 단원 김홍도의 자화상으로 여겨지는 ‘포의풍류도’라는 그림에는 비파를 타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흙벽에 종이창 내고, 한평생 벼슬 없는 선비로 노래나 읊으며 살아가리’라는 글도 있어, 비파가 청빈한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악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시대에 전주 출신의 송경운이라는 사람은 비파 연주로 유명해서, 당시에는 누가 무엇을 하든 그 수준을 얘기할 때면‘송경운의 비파와 비교해서 어떤가?’ 묻곤 했다고 한다. 그런 경운이 병에 걸려 죽게 되자 제자들을 불러놓고 당부한 얘기가 있다.‘나는 음악을 업으로 했으니, 내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되, 묻으러 가는 길에는 너희들이 내 업을 잡아 혼령을 즐겁게 하라. 혹시라도 세상을 놀라게 하지는 말아라.’
그러니까 장례식에서 곡을 하는 대신 비파를 연주해 달라는 것인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불안은커녕, 평생 즐기던 음악으로 기쁘게 떠나리라는 마음..
무릇 음악으로 도(道)를 이룬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경지가 아닐까 싶다. 전례가 없는 당부지만 스승의 마지막 소원을 거역할 제자는 없을 터.
송경운이 탄 상여는 상두꾼의 상여소리와 비파소리를 벗 삼아 마지막 길을 떠났고, 그 기이한 광경을 보려고 성 안 가득 모인 구경꾼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궁중의 의식음악에서부터 평범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고루 사랑했던 악기 비파지만, 어찌된 일인지 점점 비파를 연주하는 사람이 드물어지더니 마침내는 그 연주법마저 사라진 지 백여 년이 되었다. 아마 우리가 더 이상 기타를 즐기지 않는 것이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비파가 멀어진 것 또한 비슷한 까닭이었으리라. 고조선을 상징하는‘비파형 청동검’도 바로 이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지만, 이제는 비파형 청동검은 알아도 비파는 모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만약 비파가 의식이 있어 이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척이나 섭섭해 했을 일이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는 중국을 오가며 비파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따로 비파 전공을 두는 대학도 있다고 하고, 최근에는 비파 연주를 포함한 퓨전 국악그룹도 등장했다. 이제 비파의 부활을 기대해도 좋을 것인지, 그 답은 다시 몇 십 년이 흐른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