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빈(서울개봉초등학교 학부모)
학교에서 5교시가 끝난 후 곧장 영어학원으로 달려가야 할 아이가 오늘은 집으로 들어왔다. 엥? 표정도 영 아니었고 다리마저 절뚝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학원에 가기 싫어 해찰 피우는 아이가 아닌지라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에 다그치기보다는 표정의 변화 없이 슬쩍 물었더니 다리를 다쳤단다.
수업을 마치고 학원을 가기위해 교문을 나섰는데 앞에서 누군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달려 오길래 살짝 피했단다. 하지만 운 없게도 그 뒤에서 달려오던 자전거에 받혔다는 것이다. 자전거 페달에 무릎 정강이가 깨져 상처가 났다. 자전거를 타던 어른은 “괜찮냐”고만 묻고 그냥 갔다나? 참, 무슨 어른들이 그 모양인지 화가 났다.
그러나 아이는 어른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며 도리어 나를 위로한다. 그리곤 아픈 무릎을 문지르며 집에까지 그냥 왔다고 했다. 이 녀석이 대견한건지 바보스러운 건지 모르겠다.
아침에 가져간 우산은 가방에 고이 모셔 둔 채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처연하게 맞으며 돌아온 아이를 보며 속상했지만 “그래, 우리 아이가 많이 컸구나, 상대방이 일부러 그런 건지, 실수로 그런 건지도 알고. 또 그것을 용서하고 꾹 참으며 삭일 줄도 아는 녀석이구나.”싶어 아무 말 없이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서둘러 떡볶이를 만들어 주었더니 점심식사를 굶은 것 마냥 먹성 좋게 후다닥 잘도 먹어댄다. 열심히 먹다 자신이 생각해도 겸연쩍었던지 흘깃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그런다. 엄마가 해주는 떡볶이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다고...
다른데도 아니고 무릎이 자전거 페달에 받쳐서 깨졌으니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했더니 이 녀석 하는 말이 놀랍다.
“엄마는. 뭘 이런 걸 가지고 병원까지 가? 그냥 조금 있으면 나을 거 같어. 이따가 4시쯤에 창민이 오기로 했거든. 걔도 나 땜에 오늘 학원 아직 안 갔어요. 이따가 걔랑 학원 갈 거니까 병원은 갈 필요 없어요.”
“너 정말 괜찮아? 아파서 학원도 안간 녀석이?”
“응 괜찮아. 그리고 이따가 태권도 학원도 가야하잖아. 다음주에 승단 심사받아야 하니까 거기도 빠지면 안 되거든. 떡볶이나 좀 더 줘”
아이는 실컷 먹고 한 숨 토막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정말로 잠시 후 찾아 온 옆집 창민이와 같이 학원에 갔다.
요즘 아이들의 꽉 짜인 현실이 엄마 마음 같아서야 하루 쯤 실컷 쉬게 하고 싶지만 자신이 스스로 제 생활의 테두리를 익혀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나름대로의 습관이 중요하다 싶어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래놓고 지금 난 마음이 참 서글프다.
예전 우리들처럼 얼마만큼의 응석 섞인 엄살이 먹혀들지 않는 현실보다도 그 현실을 이미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 영악한 아이들의 행동이 도리어 더 당혹스럽다고나 할까.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가 어떤 상황에 어떻게 처세해야 하는지를 알아버린 조숙함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서글프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더 어울릴법한데 벌써 세상의 이치를 터득해 버린듯한 요즘의 어린 우리 아이들을 보니 그냥 좀 안쓰럽고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