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돼지저금통!! 1970년대

초등학교 앞 문방구는 그곳만의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좁은 공간에서 삐져나온 듯 입구에 한 묶음씩 걸려있던 빨간색 플라스틱 돼지저금통은 문방구의 가장 특징적인 풍경 중 하나다. 갈수록 동전의 역할이 줄어드는 요즘 세상에 저금통이 인기상품일 리 만무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암시한다.

돼지저금통의 유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중세 유럽인들이 ‘pigg’라는 오렌지 빛 점토로 돈을 담는 그릇을 만든 것이 ‘piggy bank’, 즉 돼지저금통이 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미국 캔자스 주의 한 소년이 한센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돼지를 키운 훈훈한 사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든 꽤 여러 나라에 돼지 모양의 저금통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국내에도 다양한 저금통이 등장했지만 역시 저금통의 대명사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빨간색 돼지저금통이다.

빨간 돼지저금통의 탄생 배경과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력한 정황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저금통이 돼지의 모양을 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돼지를 특별한 동물로 생각한 것에서 비롯된다. 1960년대에 이미 돼지 그림이 가정과 사무실에 걸려있었고 ‘가화만사성’과 같은 글귀가 담겨있기도 했다. 다산을 상징하는 복스러운 돼지 그림으로 부(富)를 염원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린 이상향의 풍경에도 돼지가 빠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몇 푼이나마 재산을 모으는 저금통에 돼지 이미지가 사용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 돼지 모양이냐는 의문 다음으로는 시기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1원, 5원, 10원 등 동전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이므로 그 이전에는 동전을 모은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럭키화학에서 플라스틱 제품이 하나 둘 생산되기 시작한 것도 1960년대의 일이다. 게다가 플라스틱 성형 기술이 안정되어 일상에까지 자리잡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했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이 갖춰진 뒤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한 푼 한 푼 모으는 저축 습관이 미덕이 되면서 저금통이 집집마다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돼지저금통의 생김새를 보면 해외의 사례들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전체적인 이미지는 섬세하지 않고 두루뭉술하다. 돼지의 특징인 코나 꼬리, 다리의 형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퉁퉁한 타원형의 외곽선만 두드러진다. 이것은 제작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출성형이 아닌 블로우 성형이라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기술적인 요인이 가장 크다. 몸통의 중심선을 기준으로 좌우의 한 벌 금형에 폴리에틸렌 수지를 주입하고 공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얇은 스킨을 가진 저렴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퇴화된 듯한 다리 부분은 너무 얇아져서 분홍빛을 띠고 엉덩이에는 공기 주입구 흔적으로 조그만 구멍이 나있고 금형이 맞닿은 부분인 파팅 라인(Parting Line)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포인트를 주려고 검은 색 붓터치로 매력적인 눈을 그려 넣었지만 대부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조금씩 비뚤어져 있다.

제품의 완성도 면에서 보자면 이 돼지저금통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그래도 미운 구석이 없이 풍만한 몸집은 동전을 가득 품어주는 데 무리가 없다. 요즘 표현대로 ‘착한’ 가격이라 손쉽게 구입할 수 있고 급할 때는 연질 플라스틱의 장점을 살려서 벌어진 틈 사이로 동전 몇 개쯤 꺼낼 수도 있다. 물론 최후의 순간, 즉 저금통을 깬다고 표현하곤 하는 날이 오면 돼지저금통의 등을 따거나 배를 가를 수밖에 없다. ‘쨍그랑 한 푼’으로 돼지저금통의 배를 불리는 일은 이제 추억처럼 아득해졌다. 동전 제작단가가 높아지자 돼지저금통이 동전 유통을 가로막는 주범으로 몰렸고 동전이 가득한 돼지저금통은 은행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2007년에는 황금돼지해라고 해서 고급형 돼지저금통이 인기를 누렸고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 덕분에 돼지저금통이 잠깐 유행한 적도 있다. 이때 저금통은 저축 자체보다는 성의와 애정을 보여주는 아이콘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돌이켜보면 문방구 입구에 매달린 돼지저금통은 처음부터 팔기 위한 상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희뿌연 먼지가 증명하듯 그것은 복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사물로 늘 그렇게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빛바랜 빨간색처럼 동전을 모으던 기억이 사라진 오늘날에, 이 빨간 플라스틱 돼지저금통은 대박의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돈을 모으던 초심을 떠올리게 해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 애착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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