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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위를 피해 청계천 오간수교 부근에 나와 있는 시민들. |
말복이 지나고 입추가 지났건만 더위가 꺾이지 않는다. 낮 기온이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냉방으로 인한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다. 태양열에 달아오른 아스팔트. 각종 에어컨에서 내뿜는 더운 바람.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라디에터 방사열. 한마디로 도시는 짜증나는 찜통이다. 이러한 도시의 무더위를 청계천이 접수했다.
청계천이 새로운 피서지로 떠올랐다. 연일 계속되는 찜통더위에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찾는다. 비록 북악에서 발원한 자연수는 아니지만 물이 흐르는 청계천이 다른 지역보다 시원하기 때문이다.
청계천관리공단에 따르면 시청 앞, 남대문 등 다른 도심권보다 평균기온이 5~6도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자연친화적인 도심 속의 피서지로 검증된 셈이다.
옛 선인들은 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 계곡을 찾거나 동구 밖 당산나무 그늘 아래 모시옷 입고 삼삼오오 모여 부채질로 더위를 이겨냈다. 교량이 건설된 근대 이후엔 다리 밑을 많이 찾았다. 다리 밑엔 그늘이 있고 통풍구 구실을 하기 때문에 시원했다.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청계천은 남녀노소 모두가 찾는 도심 속의 피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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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놀이에 여념이 없는 어린이들. |
청계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한다. 백운동 계곡에서 시작한 실개천이 인왕산 옥류동 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만나 내자동을 거쳐 청계천의 시원이 된다. 또 하나의 물줄기는 삼청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경복궁 동십자각 옆 중학천을 흐르다 광통교 부근에서 합류한다. 그리고 남산에서 흐르는 물은 인현동과 장충단 계곡을 흘러 청계천과 합수되며 하류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도시하천이다.
청계천이 복원된 지 1년이 가까워온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외 관람객이 다녀갔다. 심지어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찾을 만큼 서울의 관광명소로 등장했다. 하지만 흐르는 물만 구경할 뿐. 청계천에 살아 숨 쉬는 문화와 역사를 간과하고 있다. 청계천에 가면 역사가 살아있다. 방학기간 자녀의 손을 잡고 시원한 청계천을 방문하여 역사를 호흡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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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통교에 사용했던 신장석. |
조선왕국 500년 도읍지의 숨결이 살아있는 청계천은 곳곳에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그 첫째가 광통교(廣通橋)다. 1410년에 건설된 이 다리는 조선 개국공신들의 애증이 서려있는 유서 깊은 다리다.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던 신덕왕후에 의하여 권력의 핵에서 밀려났던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후 정동에 있던 그의 계모 신덕왕후 묘에 사용된 신장석을 뜯어다 만든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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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 |
광통교는 어가(임금의 가마)나 외국 사신들의 가마가 지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그 당시에 제일 크고 넓은 다리였다. 또한 정월 보름날이면 장안의 부녀자들이 쏟아져 나와 답교놀이를 하던 곳이다.
원형이 보존되었다면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제대로 복원되지 못하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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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 |
성군은 치산치수(治山治水)라 했던가. 두 번째가 수표교(水標橋)다.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다리다. 수표교는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1420년(세종2년)에 건설되었다.
1760년 (영조 36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
수표교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장희빈이다.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에서 우연히 장옥정을 만나고, 임금 숙종이 그 여인을 잊지 못하여 궁으로 불러들여 궁녀가 된 여인. 왕의 총애를 받아 세자 균(훗날 경종)을 낳아 희빈으로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었으나 지아비 숙종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여인. 이러한 역사적인 숨결이 숨어있는 수표교가 장충단공원에서 셋방살이 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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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 철제구조물 복원된 수표교. |
많은 시민과 문화재 관계자들이 원위치 복원을 요구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전시행정에 급급한 임기 말 지자체 단체장의 문화재를 바라보는 안목만 여실히 드러냈을 뿐이다. 이러한 사연을 안고 있는 광통교와 수표교 사이에 관심을 갖고 봐야할 곳이 있으니 반차도 도자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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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봉사자로부터 정조대왕 반차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시민들. |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그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성 현륭원을 참배하는 기록화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벽화다. 가로 세로 30cm 세라믹 타일 5,120장을 이어붙인 길이 192m의 세계 최대 도자벽화다. 원본은 원본으로서의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고 청계천에 재현된 벽화는 역사적인 사건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재탄생 시킨 작품이다.
원본 그림 반차도는 반열도 또는 노부도 라고 불리는 의궤도의 일종으로서 풍속적인 성격을 띤 기록화다. 정조대왕 화성행행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라는 정식 명칭을 갖고 있는 정조대왕 반차도는 화성행차도 라고도 불린다.
당대의 궁중화원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이 정조의 어명에 의하여 2년여에 걸쳐 완성한 가로 15m 세로 18m에 이르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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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자 타일로 재현한 반차도. |
흑백 목판본으로 남아있던 정조 반차도는 1994년 채색되어 서울대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다. 조선개국 이래 최대의 국가적인 행사로 평가받는 정조대왕의 화성행차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가 그 목적이 있었지만 어머니 혜경궁홍씨 환갑잔치와 살아있으면 어머니 홍씨와 동갑으로 회갑을 맞을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 스며있다.
다음은 오간수교다. 오간수교와 오간수문을 혼동하시는 분이 계신데 오간수교와 오간수문은 분명히 다르다. 오간수문은 5칸의 아치형 수문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수문위에 성벽 따라 조그만 길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통행을 위한 길이라기보다 수문을 관리하고 경비하는 군졸들의 순라길이었다.
오간수문은 서울 성곽을 따라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를 연결하는 수문으로서 원형이 살아있다면 당시의 건축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인데 성벽과 함께 사라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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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자 타일로 재현한 오간수문 사진. |
오간수교는 1907년 수문과 성벽을 헐어내고 만든 다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일반인들이 청계천 남북을 잇는 중요 교통로로서 편리하게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인근에 경성전기회사가 들어오고 지금 종합시장 자리에 전차 차고지가 생기면서 서울 장안의 교통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여기에서 출발한 전차가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마포, 용산, 영등포, 영천으로 연결되었다.
마지막으로 영도교다.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가던 단종이 그의 아내 송씨(정순왕후 추존)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던 다리다. 구중궁궐 지체 높은 왕비에서 평민으로 강등당하고 흥인문 밖 정업원에 있던 송씨가 단종이 귀양간다는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달려와 단종을 눈물로 보내던 다리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영도교를 건너면서 자꾸만 뒤돌아 보던 단종은 살곶이 다리를 건너 뚝섬 나루터에서 영월로 향했다. 나이 어린 임금의 유배생활은 죽음의 예비시간인가.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된 후 그곳 청령포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곳에 묻혔다.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다리 영도교
여자는 시집가면 시집에 뼈를 묻는다 한다. 단종비 정순왕후는 여산 송씨 송현수의 딸로 태어나 전주 이씨 집안에 시집갔다. 하지만 지아비 옆에 눕지도 못하고 정씨 묘역에 잠들어 있다. 단종이 영월로 떠난 후 정업원에 거쳐하며 매일 아침 동망봉에 올라 지아비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송씨가 8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으나 갸날픈 여자의 몸 하나 누일데가 없었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씨 집안으로 시집간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가 거두어 주었다. 그래서 정씨 집안에 묻혀있는 것이다. 그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사릉이다.
영도교에서 이별한 단종과 정순왕후는 죽어서도 만나지 못했다.
┃국정넷포터 이정근 (k30355k@naver.com)
